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어둠의 심연 (문단 편집) === 19세기의 콩고 ===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unch_congo_rubber_cartoon.jpg|width=250]] || || '''고무에 휘감기다(In the rubber coils) - 콩고 '자유'국의 모습'''[br]영국 잡지 《Punch》의 만평 || || [[파일:River_Congo_svg.png|width=350]] || || [[콩고 강]] || 말로의 여행의 배경이 되는 [[콩고 자유국]]은 [[벨기에령 콩고]] 및 현대 [[콩고민주공화국]]의 전신으로, 서유럽만한 지역 전체가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개인의 '''사실상의 사유지'''였다. 1870년대, 유럽에서는 식민지 확장 열풍이 극에 달했다. 세계 각지로 탐험가들과 군인들, 개척자들이 보내져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국가들의 주권을 빼앗아갔다. 벨기에 왕국의 왕 [[레오폴드 2세]] 또한 이런 열풍에 심취한 이 중 하나였는[* 막상 당시 벨기에 정부는 많은 자원이 필요하고 위험한 식민지 정책에 큰 관심이 없었다.]데, 먹을 만한 땅은 이미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선두주자들이 가져간 상태였다. 그러자 그는 얼마 남아있지 않은 비점령지였던 [[콩고 강]] 유역 밀림 지대에 관심을 가졌다. 레오폴드 2세는 꾸준히 이 지역에 탐사대를 파견하여 지리와 부족들, 특산품 등을 조사하였고, 동아프리카에서 초원을 넘어오는 [[잔지바르|잔지바르 술탄국]]의 [[스와힐리족|스와힐리 아랍인]]들이 동부 지역에서 [[노예무역]]을 벌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탄자니아]] 동부 해안과 [[잔지바르]] 섬, 일명 [[스와힐리]] 해안은 아랍계 식민제국이었던 [[오만 제국]]의 가장 핵심적인 식민지로서 많은 [[노예무역]]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18세기에 [[나디르 샤]]의 페르시아 군대가 오만 본토를 침략하자 이곳은 오만의 중심지가 되었고, 19세기 후반 오만 왕실이 분열하자 오만 본토와 독립된 잔지바르 술탄국이 된다. 잔지바르는 19세기에도 노예무역을 계속했지만 이 때문에 탄자니아에서 사업을 하려던 [[독일 제국]]과 [[영국]]과 충돌하였다. 결국 탄자니아는 [[독일령 동아프리카]]가, 본토인 잔지바르는 [[영국-잔지바르 전쟁]]을 거치며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한다. 콘래드는 바로 이 때, 잔지바르 술탄국이 점차 몰락하던 시기에 콩고를 여행했다. 아직 잔지바르 본토가 멸망하지는 않았지만, 잔지바르계 노예상인 티푸 팁이 이끄는 우테테라 술탄국(Sultanate of Utetera)이 콩고 동부 경계에 자리를 잡고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자유국 군대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1876년, 그는 이를 빌미삼아 국제 아프리카 협회라는 기관을 설립하여 '''콩고에 독립적인 자유 국가를 세운 뒤 문명의 혜택을 고통받는 흑인들에게 가져다 주고, 그들의 발전을 이끌어 주겠다'''는 말로 지지자를 끌어모았다. 많은 유럽인들은 [[백인의 의무|인도적이고 숭고한 의무]]를 혼자서 기꺼이 짊어지겠다는 레오폴드의 번지르르한 말에 넘어가 큰 지지를 보냈다. 그렇게 [[독일 제국]]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주선한 1884년의 [[베를린 회담]]에서 콩고에 대한 지배를 인정받은 그는 철저히 사익을 위해 콩고를 경영하기 시작한다. 이 '[[콩고 자유국]]'은 법적으로는 독립 국가이자 벨기에와는 같은 왕을 모실 뿐인 [[동군연합]]이었다. 하지만 실상은 설립을 주도했고 휘하 기업 및 위원회들을 통해 콩고의 모든 것을 쥐고 있는 레오폴드 왕 '''개인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국제사회가 착취나 하라고 콩고 땅을 준 게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독립국가인데다 자신이 모든 권한을 쥐고 있었으니, 레오폴드는 어떤 정부의 간섭도 받지 않고 악랄한 전제군주로서 마음대로 콩고 국민들을 부릴 수 있었다. 근대화는 레오폴드의 이익을 위해 콩고 전역을 개발하는 명목으로, 계몽은 말을 듣지 않는 흑인들의 '야만성'을 억누르는 강력한 처벌의 근거로써만 쓰였다. 그리고 실상을 모르는 유럽인들은 악랄한 아랍 노예상들을 몰아내고 흑인들을 문명화한다는 위장용 간판만 믿고 레오폴드의 사업에 투자했다. 레오폴드는 자신의 이 독립 영지에서 '무명 벨기에회'라는 회사를 세워 콩고의 주 특산품인 고무와 상아를 채취하며 엄청난 금전적 이득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이 넘는 콩고 사람들이 할당량을 채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팔다리를 잘리거나 살해당했다.''' 콘래드는 바로 이 시기 무명 벨기에회에 고용된 선원이었고, 잘 꾸며진 말로 포장한 유럽 문명의 이면에 숨겨진 어둡고 야만적인 진실을 두 눈으로 목도한다. 이 끔찍한 범죄 사실은 콩고 자유국 정부와 레오폴드의 언론플레이, 외부인 차단, 분식회계 등으로 철저하게 은폐되었지만 오래지 않아 폭로되었다. 레오폴드가 내세운 소위 '미개한 이들에 대한 문명화 사명'을 믿고 콩고로 나아간 이들 중 콘래드나 [[로저 캐즈먼트]][* 아일랜드인 인권운동가, 외교관. 그는 당시 콩고에서 벌어진 인권 유린에 대해 철저하게 조사하고 이를 '캐즈먼트 보고서'란 이름으로 문서화해 유럽 사회에 알림으로써 레오폴드의 악랄한 지배를 종식시켰다. 이 공으로 영국 정부에게 [[기사]] 작위와 훈장까지 수여받았지만, 후에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모든 영예를 박탈당하고 [[부활절 봉기]] 도중 처형된다. 영국과 전쟁 중이었던 독일 제국과 접촉해 무장봉기에 필요한 무기를 공급받으려 했다는 것이 그 이유. 죽고 나서도 그의 수난은 끝나지 않았는데, [[게이]]였다는 이유만으로 가톨릭 가치관이 지배하는 조국 [[아일랜드]]에서 오랫동안 평가절하당하기도 했다. 다만 현재는 재평가되어 아일랜드인들의 국민적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고, 영국 정부도 그에게 수여된 영예를 복권해주었다. 콘래드와는 콩고에서 만나 친구가 되었고, 이후로도 편지를 통해 자주 의견을 교류했다.], 조지 윌리엄스[* 미국의 목사, 정치가이자 작가.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자유인으로 태어난 [[흑인]]으로, 이발사로 일하다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하여 활약했다. 후에 인디언 토벌전에서 부상을 입어 의병제대했고, 하워드 대학교와 뉴턴 신학교에서 수학하여 침례교 목사가 되어 다양한 사회 활동에 힘썼다. 역사가로써 아프리카계 흑인들의 역사를 저술했고, 런던에서 열리는 세계국제선교회의의 대의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벨기에에서 레오폴드 2세를 인터뷰하게 되었고, 그의 이상에 감명받아 콩고로 향했다가 '''지옥을 보게 된다.''' 그는 증거를 모아 공개 서한을 유럽에 보내 이와 같은 범죄 행위를 규탄했다. 이는 후에 비난을 견디다 못한 벨기에 정부가 왕에게서 콩고를 빼앗도록 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귀국 1년 뒤인 1891년에 영국 런던에서 사망했다. 영화 [[레전드 오브 타잔]]에서는 타잔의 동료로 등장하며, [[사무엘 잭슨]]이 연기했다.] 같은 몇몇 사람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곤 각국 언론에 진실을 폭로했다. 이후 전세계적 비난에 직면한 벨기에 정부와 의회는 왕에게서 콩고를 빼앗아 [[벨기에령 콩고|정부 산하의 식민지]]로 개편하여 직접 지배를 시작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